반도체, 배터리, 원자재, 식량 — 우리 경제가 의존하는 것들 중 상당수가 국경 밖에서부터 시작된다.
최근 몇 년간 글로벌 공급망은 단순한 물류 이슈가 아니라 국가 경제의 근간을 뒤흔드는 구조적 변수로 부상했다. 코로나19 이후 해운대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 수급 위기,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으로 인한 수출 규제는 한국 경제 전반에 직접적인 충격을 주고 있다. 하지만 이 주제는 여전히 뉴스의 뒷면에 숨어 있다. 공급망은 '배경'이 아니라, 이제는 '주연'이 되었다.
1. 반도체부터 배터리까지: 한국 산업의 핵심은 글로벌 공급망 위에 있다
한국 경제의 중심축 중 하나는 반도체 산업이다. 하지만 이 반도체는 순수하게 국내 기술과 자원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핵심 원자재인 포토레지스트, 고순도 불화수소(HF), EUV 장비 등은 일본, 네덜란드, 미국 등 외국 기업에 의존하고 있다. 배터리 산업 역시 마찬가지다. 양극재·음극재·전해질·분리막으로 구성된 배터리 셀의 소재 대부분이 해외에서 수입되며, 그 원재료인 리튬·코발트·니켈 등은 특정 국가(주로 중국, 호주, 아프리카) 공급에 의존적이다.
이처럼 산업별 글로벌 밸류체인은 매우 복잡하고 다층적이다. 단일 부품의 부족이 전체 생산라인의 정지를 초래하는 이른바 '병목현상'은 단순한 물류 이슈가 아니다. 이는 생산계획, 수출 계약, 재고관리, 기업 실적 등 전방위적 영향을 주며 한국 전체 GDP에도 그림자를 드리운다.
2. 공급망은 단순 운송이 아니다: 지정학과 무역 정책의 교차점
공급망 위기는 단지 선박이 부족하거나 항구가 혼잡한 문제가 아니다. 그 이면에는 거대한 지정학적 이해관계가 놓여 있다. 미국은 ‘IRA(인플레이션 감축법)’를 통해 자국 내 또는 FTA 체결국에서 생산된 부품과 원자재를 우선시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 중국은 희토류 등 전략 자원의 수출을 제한하며 자국 산업 보호와 글로벌 영향력 강화를 동시에 꾀하고 있다.
한국처럼 수출 의존도가 높은 나라는 이러한 정책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전기차 배터리의 경우 미국 시장에서 IRA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보조금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LG에너지솔루션이나 SK온 등의 기업은 북미 현지 생산을 빠르게 확대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막대한 비용을 동반하며, 결과적으로 소비자에게 전가될 수 있는 구조다.
또한 최근의 ‘프렌드쇼어링’(friend-shoring, 정치적으로 우호적인 국가 간 공급망 구축) 트렌드는 기존 글로벌 자유무역 구조를 재편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소외되거나 중간 위치에 있는 국가는 새로운 공급망의 ‘틈’에 빠질 수 있다. 한국은 그 중심에 있다.
3. 실생활과 연결되는 비용 상승: 소비자도 '공급망 리스크'를 체감하는 시대
공급망 리스크는 궁극적으로 개인의 삶에도 영향을 준다. 예를 들어, 2020~2022년 사이 차량용 반도체 부족으로 자동차 출고 지연 현상이 수개월 이상 지속되었고, 중고차 가격이 신차를 웃도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배터리 원자재 가격의 급등은 전기차의 소비자 가격 인상으로 이어졌으며, 식량 수급 불균형은 곡물가 상승과 외식비 상승으로 이어졌다.
공급망의 불안정은 기업 원가 상승 → 소비자 물가 상승 → 실질 구매력 하락으로 이어지는 연쇄작용을 낳는다. 특히 저소득층일수록 생활비 지출에서 식료품, 에너지, 교통비 비중이 높기 때문에 공급망 리스크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다. 이는 소비 위축을 야기하며, 결국 국내 내수경기 침체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유발한다.
따라서 정부와 기업 모두 공급망 이슈를 단기적인 트렌드가 아닌, 구조적인 경제 변수로 받아들이고 이에 대한 전략을 장기적으로 수립해야 한다. 공급망 다변화, 전략 비축, 생산기지의 분산 등이 이제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고 있다.
마무리
글로벌 공급망은 이제 단순한 물류와 비용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한국 경제의 생존 구조 그 자체다. 반도체, 배터리, 에너지, 식량 — 이 모든 것이 세계 곳곳의 복잡한 연결고리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 사슬이 하나라도 끊기면 우리의 일상은 예기치 않게 흔들릴 수 있다. 경제를 읽는 눈은 이제 더 이상 환율, 금리만을 바라보지 않는다. 공급망은 지금, 경제의 새로운 키워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