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 사회에서 정년 연장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기대수명이 80세를 훌쩍 넘기면서, 60세 정년은 이제 현실과 괴리가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정부와 기업은 고령층의 경험을 살리면서 생산 가능 인구를 확보하기 위해 정년 연장을 고려하고 있지만, 청년층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옵니다. "노인이 일자리를 차지하면 청년은 어디로 가야 하나"라는 불안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구조적인 현실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우려가 과연 '제로섬'이라는 전제에서 타당한 것인지, 혹은 정책 설계를 통해 상생 가능한 방향이 있는지는 보다 정밀한 분석을 요구합니다.
본 글에서는 정년 연장과 청년 실업 사이의 관계를 다양한 경제 구조와 데이터를 통해 살펴보고, 양 세대 간 일자리 경쟁이 필연적인 것이 아닌 이유를 고찰하고자 합니다.
1. 고령층 노동 연장, 왜 필요한가: 인구 구조와 생산성 현실
우리나라의 인구 구조는 빠르게 고령화되고 있습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3년 기준 65세 이상 고령 인구 비중은 18.4%에 이르며, 2035년에는 30%를 넘길 것으로 전망됩니다. 노동시장에서 50대 후반과 60대 초반 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해마다 증가하고 있으며, 생산가능인구(15~64세)는 2020년을 정점으로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단지 사회복지 재정의 압박만을 초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 산업 현장에서는 숙련 인력의 이탈로 생산성과 안전 문제가 대두되고 있습니다. 건설, 제조, 운송 분야에서 경력직 기술자의 은퇴는 단기적으로 큰 손실로 이어집니다. 이에 따라 정년 연장은 단순한 복지정책이 아니라, 산업계의 지속가능성과 직결된 경제 구조 재설정으로 해석됩니다.
특히 60세 전후의 고령 인력은 대부분 장기근속 경험을 바탕으로 조직 내 핵심 업무나 후진 양성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일정 기간이라도 더 유지할 수 있다면, 젊은 세대와의 전환 과정을 보다 유연하게 만들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됩니다. 일본은 이미 70세까지의 고용을 목표로 정책을 전환했으며, 독일 역시 연금 개시 연령을 연장하며 노동 참여를 독려하고 있습니다.
단, 중요한 것은 '정년 연장'이 반드시 '정규직 보장'이나 '기존 임금 체계 유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유연근무, 시간제 전환, 프로젝트 기반 계약 등 다양한 고용 형태를 통해 고령층의 생산성을 유지하면서 임금 부담을 조절할 수 있는 체계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고령층의 고용 연장이 청년층 일자리와 직접 충돌하지 않고 오히려 상호 보완적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2. 청년층 일자리 문제의 본질은 구조적 수요 부재
청년실업 문제는 단순히 고령층 고용과의 경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한국은 OECD 평균보다 청년 고용률이 낮고, 비경제활동 인구 중 '취업을 희망하지 않는' 인구 비중이 빠르게 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근본적으로 청년층이 원하는 ‘양질의 일자리’ 자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청년층(15~29세)의 실업률은 2024년에도 여전히 7%대를 기록하고 있으며, 체감 실업률(확장 실업률)은 20%에 육박합니다. 이들은 고령층과 동일한 일자리 풀을 경쟁하지 않습니다. 청년은 신산업, 디지털 분야, 스타트업, 디자인·콘텐츠 직군을 선호하는 반면, 고령층은 숙련 제조, 공공 서비스, 전통 산업군에 분포되어 있습니다. 산업별 고용 수요가 다르기 때문에 정년 연장이 청년의 '자리'를 빼앗는다는 논리는 지나치게 단순화된 해석입니다.
또한 많은 기업들은 고령 인력을 퇴직시키고 나서도 곧바로 청년을 대체 채용하지 않습니다. 대체보다는 '자동화' 또는 '업무 재배분'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고, 이는 전반적인 고용 총량을 줄이는 방향으로 이어집니다. 정년 연장을 막는다고 해서 청년 채용이 늘어난다는 보장은 없는 것입니다.
청년 일자리 창출은 결국 새로운 산업의 확장과 맞물려야 합니다. 디지털 전환, 에너지 전환, 복지 서비스 확대 등에서 신규 수요를 창출하고, 이에 걸맞은 교육과 인력 매칭 시스템이 병행될 때 청년 고용의 구조적 기반이 마련될 수 있습니다. 결국 고령층 일자리 유지와 청년 고용 창출은 충돌이 아니라, 함께 갈 수 있는 문제입니다.
3. 제로섬 프레임에서 벗어나려면: 정책 설계의 정교화 필요
정년 연장과 청년 실업 간의 관계를 단순히 제로섬 게임으로 인식하는 것은 정책 실패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고령층의 노동 참여 연장과 청년층의 고용 촉진이 병행 가능한 구조를 어떻게 설계하느냐입니다.
첫째, 고령층 고용은 일률적인 정규직 유지가 아니라, 점진적인 시간제 전환, 멘토링 중심 직무 배치, 연령별 임금 곡선 조정 등을 통해 지속 가능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일본의 ‘생애 재설계 프로그램’처럼, 고령 근로자가 조직 내에서 역할을 재정의받고 생산성을 유지할 수 있는 시스템이 모범 사례로 꼽힙니다.
둘째, 청년 고용 확대는 스타트업, 중소기업, 신산업 진출 촉진을 위한 인센티브 강화와 직결되어야 합니다. 청년층은 새로운 가치에 민감하고 유연한 근무환경을 선호하는 만큼, 기존 대기업 중심 노동시장에 의존하기보다 창의 기반 산업 확장을 통해 고용 지형을 재편할 필요가 있습니다.
셋째, 고용 보조금이나 사회보험료 지원과 같은 재정정책은 고령층과 청년층 양쪽을 아우르는 방향으로 설계해야 합니다. 예컨대, 일정 연령 이상의 고령자를 시간제로 고용한 기업에 인건비를 보조하고, 동시에 청년층에게는 신산업 직군으로의 전환 교육비를 지원하는 ‘세대균형형 정책’이 가능할 것입니다.
이처럼 정년 연장은 단지 고령자 문제도, 청년 고용도 아닌 ‘노동시장의 구조적 재설계’ 문제입니다. 이를 단순한 세대 간 경쟁의 시각이 아니라, 경제 전환기에서의 이행 전략으로 바라본다면, 상생적 접근이 가능해집니다.
'같이 가는 길'을 설계하는 노동시장 개혁이 필요하다
정년 연장과 청년실업을 제로섬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사회적 갈등을 키우고 정책적 선택지를 좁힐 수 있습니다. 실제로는 두 세대의 일자리 구조가 다르고, 노동시장은 정태적 공간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유기적 구조입니다. 고령층은 그들의 숙련을 통해 조직의 연속성을 확보할 수 있으며, 청년층은 새로운 영역에서 가치를 창출할 수 있습니다.
정년 연장은 생산 가능 인구 감소 속에서 불가피한 선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청년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고령층의 노동을 생산적으로 유지하고, 동시에 청년에게는 새로운 기회를 열어주는 구조로 전환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독일과 일본의 사례는 정년 연장과 청년 고용이 충돌하지 않고 상생하는 정책 설계가 가능하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앞으로의 정책은 세대 간 양보나 경쟁이 아니라, 각 세대의 강점을 활용하는 노동시장 설계를 목표로 해야 합니다. 고령층에게는 점진적 역할 전환과 시간제 일자리를, 청년층에게는 창의적 산업 기반과 유연한 고용 환경을 제공함으로써, '일자리의 양극화'가 아닌 '일자리의 다변화'를 추구해야 할 시점입니다. 이제는 제로섬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세대 간 공존 가능한 경제 구조를 설계해야 할 때입니다.